기계가 멈춘 뒤 방 안은 차갑고 맑은 흰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빛의 격렬한 맥박은 사라졌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나연은 기계 앞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회로를 끊는 과정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피부는 붉게 물들고, 작은 물집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멈춘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차가운 빛이 그녀의 대답 대신이었다.
주현은 비틀거리며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다 멈춘 건가? 나연, 우리가… 성공한 거야?”
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앞에서 여전히 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평화롭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듯한, 일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것이 단순히 멈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M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공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 나연. 네가 한 선택이 새로운 문을 열었을 수도 있지만, 그 문이 어디로 통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넌 아직도 네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구나.”
M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모든 걸 안다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선택은 내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군.”
“네가 기대했다니, 무슨 뜻이야?” 나연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M은 천천히 방 중앙의 기계를 가리켰다. “네가 이 기계를 멈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이건 단순히 출발점일 뿐이다. 네가 멈추려 한 것은 파괴의 도구였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이기도 했다.”
나연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려 했지만, M의 태도는 여전히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마치 그녀가 이미 그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게 다 네 계획이었어?” 나연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
M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믿는 건 오만이지. 그러나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너는 항상 너 스스로를 구원자로 여겼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결심을 했으니까.”
“그래서 네가 나를 이 자리까지 끌어들인 거야?” 나연은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끌어들인 건 아니야.” M은 천천히 걸어 나연 앞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침착함과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너는 네가 믿는 정의와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나는 단지 그 길을 보여줬을 뿐이고.”
나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 번 기계를 바라보았다. 흰빛은 여전히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 안에는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주현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희망의 흔적도 엿보였다.
나연은 그녀를 돌아보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이 기계를 멈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게 진짜로 끝난 건 아닌 것 같아. 네가 말한 대로, 이건 단지 시작일지도 몰라.”
“그럼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거야? 우리가 이미 충분히 했잖아!” 주현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기계에서 느껴지는 그 기묘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때 M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이해해야 할 건, 이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네가 이 기계를 멈춘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너는 지금 선택과 자유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진정한 구원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만해!” 나연은 소리쳤다. “난 네가 말하는 구원 따윈 필요 없어. 이 세계는 네 손에서 벗어날 거야.”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면, 계속해 보아라.” M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네가 이 기계를 멈춘 것이 세상의 균형을 되찾는 길이라고 믿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나연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주현의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광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또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붉은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태어나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처럼 생긴 빛의 구조물이 하늘을 향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저건… 뭐지?” 주현이 속삭였다.
나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야 M이 말한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M이 뒤에서 말했다. “그것이 바로 네 선택의 결과다.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 네가 한 선택은 결국 이 세상의 새로운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나연은 그의 말을 듣고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